돈을 벌어야 하는 이유와 육아로 인한 고민

시간이 없다. 나는 돈을 더 벌어야 한다.

나는 지금 매우 진지한 나눔고딕체다.(나눔고딕체라 쓰고 궁세체라 읽는다.)

지금 6살, 4살 아이가 둘이 있고, 셋째를 낳아서 키우고 싶다.

나의 체력과 에너지를 보아하니 물리적으로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

나는 돈을 더 벌어야 한다.

하지만 세상은 내가 원하는 것을 쉽게 주지 않는다.

물가는 천정부지로 치솟고, 집값은 이미 하늘과 맞닿아 있다.

시대가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아직 세상에 꼰대는 많다.

그래서 육아로 눈치를 보게 되고 나의 의지는 다시 흔들린다.

내가 눈치를 본다는 것은 결국 돈이 필요하다는 이유다.

돈이 충분하다면 직장에서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고, 마트에서 가격표를 보지 않아도 되며

아이들과 살기 편한 동네로 이사가서 살면 된다.

하지만 돈이 부족하다.

직장에서 좋은 평가를 위해 눈치를 봐야 한다.

그래야 월급이 오르고 성과급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마트에서 사고 싶은 것은 많지만 가격표를 보게 된다.

그것이 꼭 필요한 것인지 고민하게 만든다.

집 주변에는 언덕이 있고, 주차장에 나와 담배피는 아저씨들이 있다.

집을 나설 때 쾌적한 공기인지 아닌지를 고민해야 한다.

1자녀당 나오는 10만원 아동수당에서 유치원에서 저녁 6시까지 버티기를 시키키위한 방과 후 특별활동비 25만원

수학적으로 계산하면 아이들 낳으면 안된다. 객관적으로 봐도 아이를 낳으면 안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이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는 내 아이를 향한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

그래서 3자녀의 부모가 되고 싶다.

과거 유럽 흑사병보다도 심각한 인구감소에 놓여있는 대한민국, 초저출산율을 갖고 있는 대한민국

가난을 되물림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대한민국 젊은이들……..

돈이 부족하다.

나는 돈을 더 벌어야 한다.

만족할 만한 돈을 쥐어주면 아이 낳을래?라고 묻는다면 여전히 많은 이들은 “NO”라고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YES” 라고 대답할 수 있다.

아이를 향한 내 사랑이 있기 때문에 난 셋째를 원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랑으로 아이를 키울 수가 없다.

돈이 너무 많이 든다는 얘기다.

스스로 많은 이미지 트레이닝을 해본다.

소비를 줄이고 사랑으로 키우고 단순히 성장만을 위한 보육을 하면 되지 않을까?라고 말이다.

처음엔 그렇게 생각하고 첫째 아이를 키우고 둘째 아이를 키웠다.

1살, 2살, 3살, 4살 점점 아이의 자아가 커질 수록 주변 친구들과 어울리면 알아가는게 많아질수록 원하는 게 생긴다

누구네 집은 이렇게 한다더라, 인스타에서 봤는데, 유튜브에서 봤는데, 친구한테 들었는데 나노단위로 생성되는 정보들이 나를 현혹시킨다.

어른인 나도 무수한 매체와 주변환경에 의지와 의식은 희미해져가고 어느덧 주변의 색과 비슷해지는 카멜레온이 되어만 간다.

전문가는 말한다.

아이에게 최대한 스마트폰을 늦게 주라고 한다.

스마트폰안에 무수한 유혹거리를 이길 수 있는 아이는 세상에 없다고 한다.

어른인 나 자신도 통제가 어려운데 아이들을 나무랄 수 없다.

나는 돈을 더 벌어야 한다.

물리적으로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랑으로 아이를 더 낳아 키울 수가 없다.

돈이 너무 많이 든다는 얘기다.

극단적으로 국가소멸 위기에 놓여있는 대한민국, 초저출산율을 갖고 있는 대한민국

가난을 되물림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대한민국 젊은이들….그들의 생각에 동의한다.

주변에 미혼이거나 결혼한 신혼부부에게 말한다.

“아이를 낳아 키우기 너무 어려운 사회다.

무자녀 또는 1명만 낳는 게 좋을 것 같다.

다만, 나처럼 아이에 대한 사랑이 많지 않다면 말이다.”

국가의 위기가 왔다.

자녀를 낳아줄 젊은 부부 또는 미래 부부들에게 모든 지원 정책이 맞춰져 있다.

그런 젊은 부부 또는 미래부부들에게 아이를 낳아 키우는 사람들은 얘기한다.

‘아이 낳지 마 너희들만 힘들어’

아이들을 낳아 키우면서 국가의 혜택을 받았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부모의 희생이 너무 많이 따른다.

그리고 부모의 부모의 희생도 따른다.

자녀의 할아버지, 할머니가 육아를 하는 시대가 온 지는 꽤 됐다.

육아 우울증이 자녀의 부모에서 그 이상의 부모로 확장되는 기현상이 나타났다.

국가적으로, 개인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우리들을 낳아서 키웠던 부모님들도 한결같이 말한다.

“요즘 애들 키우기가 왜 이렇게 어렵니? 라떼는 이렇게 힘들지 않았던 것 같은데” 라고 말이다.

육아 우울증이 왜 생기는지 너무 이해되고 공감 된다.

육아 우울증이 생기는 건 어쩌면 너무 당연하다.

나도 경험했기 때문이다.

아이를 안고 집에서 창밖 경치를 바라보면 대지의 기운이 나를 아래로 잡아당긴다.

대지가 나를 강하게 아래로 잡아당기는 경험을 했다.

마치 내가 아이를 높은 곳에서 놓아버릴 것만 같은 끔찍한 상상이 내 머릿속 통제를 벗어나 나의 행동까지 제어하려고 하는 끔찍한 경험을 했다.

육아는 어려운 게 맞다. 육아는 힘들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무자녀나 1자녀를 추천할 수밖에 없다.

지금 살고 있는 시대의 분위기나 정책의 방향이 그렇다.

2 + 1 = -1

1자녀도 국가의 소멸을 만든다.

2 + 0 = -2

무자녀는 국가를 말살시킨다.

물가는 천정부지로 치솟고, 집값은 이미 하늘과 맞닿아 있다.

시대가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아직 세상에 꼰대는 많다.

그래서 육아로 눈치를 보게 되고 나의 의지는 다시 흔들린다.

아이를 낳았기 때문에 힘든 사이클이 늘 반복되면서 힘들지만 어쩔 수 없이 살아가는 이들이 많다.

부모는 힘들다. 아이도 힘들다.

마땅한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다.

수학적으로 계산하면 아이들 낳으면 안 된다.

객관적으로 봐도 아이를 낳으면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난 이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는 내 아이를 향한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

그래서 3자녀의 부모가 되고 싶다.

나는 돈을 벌어야 한다.

물리적으로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랑으로 아이를 더 낳아 키울 수가 없다.

돈이 너무 많이 든다는 얘기다.

세상은 내가 원하는 것을 쉽게 주지 않는다.

난 아직도 3자녀의 부모가 되고 싶다.